책소개
일반적으로 육유는 산문보다는 시와 사로 이름이 더 알려졌다. 하지만 육유의 산문은 남송대 어떤 문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일단 양적인 면에서 충분한 성과를 냈다. ≪위남문집≫ 48권(사 2권은 제외), ≪남당서(南唐書)≫ 18권,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 10권, ≪가세구문(家世舊文)≫ 2권, ≪재거기사(齋居紀事)≫, ≪감지록(感知錄)≫ 1권, ≪방옹가훈(放翁家訓)≫, ≪피서만초(避暑漫抄)≫ 등이 모두 육유의 산문 저작들이다. 게다가 그의 문장 실력이 시와 사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는 것은 국사와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국사 편찬에 참여한 인물로서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가 남긴 ≪남당서≫는 방대한 사료를 고증하고 간결한 문체로 서술한 가작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마령(馬令)의 ≪남당서≫와 더불어 남당 및 오대 때의 강남 일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서다.
일반적으로 육유 산문은 증공(曾鞏)의 문체를 많이 닮았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육유는 어려서 증공을 사사한 경력이 있다. 육유는 문장 구조가 치밀하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며 함축적인 의미를 잘 활용했다. 의론문에 있어서는 논리 전개가 탁월해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냉철하고 설득력 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그의 의론문은 맹자와 한유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유가 사상을 잘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육유는 또 수필을 다작했다. 송대는 상공업이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발전해 화려한 도시 생활이 형성되고 다양한 향락 문화가 만들어졌다. 문인 사대부 역시 이러한 문화 배경 속에서 고아한 문풍에서 탈피해 자유로운 형식과 파격적인 내용을 담은 수필을 창작했다. 육유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자신만의 특징을 살린 수필을 내놓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입촉기≫와 ≪노학암필기≫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육유 산문의 특징은 시종일관 강한 애국정신과 애민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론문(政論文)이나 사전문(史傳文)같이 근엄한 문장이든 유기문이나 인물전(人物傳) 같은 부드러운 문장이든 육유는 시종일관 백성을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육유의 일부 문장만을 뽑아 해제하고 번역한 선집이다. 때문에 방대한 양의 문집에서 어떤 문장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심사숙고했다. 처음엔 일반 독자를 위해 내용과 재미를 갖춘 기문(記文) 같은 문장만을 선택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육유의 사상과 문풍을 제대로 보여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차자(箚子), 서문(序文), 발문(跋文), 서문(書文), 찬(贊), 전(傳), 명(銘), 계(啓) 등 여러 문체를 골고루 선정하기로 했다. 아울러 상술한 육유 산문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을 선정하고자 노력했다. 각 문장 도입부에는 창작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해제를 달았다. 해석은 가급적 원문에 나오는 자구를 최대한 살리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원문을 함께 실어 번역과 함께 대조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독자의 이해를 위해 지명·인명·전고 등은 각주로 설명을 달았다.
200자평
남송의 애국 시인 육유의 산문을 모았다. 시나 사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산문 특유의 유려하고도 감칠맛 나는 문장, 글줄 사이로 드러나는 격정적인 애국심과 호방한 기개, 풍부한 지식과 섬세한 감수성, 소박한 일상생활과 정 깊은 교유 관계까지, 오직 ≪육유 산문집≫에서만 만날 수 있다. ≪위남문집≫ 42권 715편 중 다양한 체제의 산문 28편과 ≪입촉기(入蜀記)≫ 6권 중 약 2권에 해당하는 문장을 뽑아 옮겼다.
지은이
육유(1125∼1210)의 자(字)는 무관(務觀),호(號)는 방옹(放翁)으로 월주(越州) 산음[山陰: 지금의 저장(浙江) 사오싱(紹興)]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해 스스로 “나는 태어나 말을 배우자마자 책을 좋아했고, 만 권을 섭렵하느라 눈이 침침해졌다(我生學語即耽書, 萬卷縱横眼欲枯)”고 할 정도였다. 그의 조부 육전(陸佃)은 휘종(徽宗) 때 상서우승(尙書右丞)에까지 올랐고 후에 박주(亳州) 지주(知州)를 지냈다. 부친 육재(陸宰)는 회남동로 전운판관(淮南東路轉運判官)과 경서로 전운부사(京西路轉運副使)를 역임했다.
육유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대는 송 왕조의 부패가 극에 달했고,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金)에게 수시로 침략을 당하던 때였다. 육유가 태어난 다음 해 금군이 송 왕조의 수도 변량[汴梁: 지금의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을 함락했다. 그는 부친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고 열흘간 굶주리며 한밤중에도 쫓겨 다니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며 수춘[壽春: 지금의 안후이(安徽) 서우현(壽縣)]에 이르렀다. 후에 다시 산음으로 돌아갔으나, 육유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고 이것이 애국정신을 고취한 계기가 되었다.
육유는 스스로 “60년간 1만 수의 시(六十年間萬首詩)”를 지었다고 말할 만큼 열정적으로 창작에 임한 문인이다. 현존하는 시도 9000수가 넘고 생전에 이미 ‘소이백(小李白)’이란 별칭을 들었다. 대표 시문집으로는 ≪검남시고≫, ≪위남문집≫, ≪노학암필기≫, ≪방옹사(放翁詞)≫ 등이 있다.
옮긴이
이기훈은 1973년 8월 서울 태생으로 세명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베이징사범대학교 문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는 세명대, 세종대, 서울여대에서 강의 중이며 상명대학교 한중문화정보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연구재단 지원 국내 박사 후(POST-DOC) 과정에 있다. 저서로는 ≪중국 말(馬) 문화 연구≫(공저, 한국마사회출판사, 2010)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조선시대 ≪국어(國語)≫ 유통과 활용>, <명대(明代) 강남(江南) 지역 ‘묵보(墨譜)’의 문화 가치 초탐(初探)>, <송대(宋代) 사천(四川) 미주(眉州)의 지역 문화와 소식(蘇軾)의 가향(家鄕) 인식> 등 10여 편이 있다. 주로 중국 고전 산문과 지역 문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차례
군사를 나누어 산동을 취할 것을 바라며 대신 올리는 글(代乞分兵取山東劄子)
도읍에 관해 중서성과 추밀원 두 부서에 올리는 글(上二府論都邑劄子)
이 장간공의 글을 읽고서(跋李莊簡公家書)
동파의 간언 초고를 읽고서(跋東坡諫疏草)
채충회의 <송장귀부>를 읽고서(跋蔡忠懷送將歸賦)
≪화간집≫을 읽고서(跋花間集)
증 문청공의 상주문을 읽고서(跋曾文淸公奏議稿)
부 급사의 서첩을 읽고서(跋傅給事帖)
요평중에 관한 전기(姚平仲小傳)
두 불승에 관한 이야기(書浮屠事)
≪통감≫을 읽고 난 후(書通鑑後)
위교에서 벌어진 이상한 사건(書渭橋事)
부지신에게 올리는 제문(祭富池神文)
무신년 엄주 지방의 농사를 장려하다(戊申嚴州勸農文)
시강을 지낸 주원회께 올리는 제문(祭朱元晦侍講文)
방옹자찬(放翁自贊)
≪동루집≫의 서문(東樓集序)
≪담재거사시≫의 서문(澹齋居士詩序)
부 급사 ≪외제집≫의 서문(傅給事外制集序)
사마온 공의 포피에 관해 새기다(司馬温公布被銘)
금애 벼루에 관해 새기다(金崖硯銘)
엄주 지주로 추천해 주신 왕 승상께 드리는 감사 편지(知嚴州謝王丞相啓)
연정에 대해 적다(煙艇記)
입촉기(入蜀記)
동호각에 대해 적다(銅壺閣記)
서소에 대해 쓰다(書巢記)
남원에 대해 적다(南園記)
새로 지은 집에 대해(居室記)
열고천에 대해 적다(閱古泉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만 종이나 되는 녹봉과 내가 가진 작은 배는 가난과 부귀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외물에 있어 나는 만 종의 녹봉은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내 작은 배에 연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구할 수 있는 것인가요? 제 의미인즉 이렇습니다. 제 가슴속은 호연하고도 커다래서 그 속에서 운무와 해와 달이 장관을 연출하고, 천둥과 비바람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록 무릎이나 겨우 얹는 아주 작은 집이지만 언제나 물 흘러가는 대로 노를 저어 순식간에도 천 리 길을 나아갈 수 있으니, 과연 이 집이 ‘연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연정에 대해 적다(煙艇記)>에서
신등이 삼가 살펴보건대 폐하께서는 영명한 결단을 내리시어 동경으로 진격해 옛 영토를 회복하고 사천과 섬서를 견제하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신등은 폐하의 청미한 옥체를 시중들고 성명(聖明)한 뜻을 받들 수 있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또한 조심스런 소견이 있사오니 감히 숨기지 않겠습니다. 소문을 들어 보니 다들 하는 말이 적군이 서북쪽을 점거하고 있어 계속 동경로를 보호할 수 없고 게다가 포학한 정치가 이어져 백성들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일 폐하의 군대가 그곳에 가기만 해도 힘들이지 않고 그 지역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깊이 살펴보면, 백성을 위로하고 적군을 토벌하는 군대라는 것은 본래 군사 수가 많음에 의미가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군대만 국경에 보내도 수많은 성이 스스로 투항해 세상에 큰 공적을 세울 수 있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겠습니까?
−<군사를 나누어 산동을 취할 것을 바라며 대신 올리는 글(代乞分兵取山東劄子)>에서
“그대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만 저희 집에 들어와 보질 못하셨기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다. 제 방 안에는 책이 궤짝 안에도 들어 있고, 그 앞에도 늘어놓았고 침대 위에도 베개나 깔개처럼 쌓아 놓았습니다. 위아래 사방이 온통 책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식사하고 생활할 때나 아파서 끙끙거릴 때나 슬픔과 근심으로 탄식할 때에도 책과 함께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손님도 오질 않고 처자식도 들여다보지 않으며 심지어 바깥 날씨가 변해도 모르고 삽니다. 간혹 일어나 나가고자 해도 여기저기 정신없이 널려 있는 책들이 마른 장작처럼 쌓여 있어 나를 포위하니 나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문득 웃음이 나와 ‘이야말로 내가 말한 대로 둥지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면서 손님을 방으로 끌고 들어가 보여 주었다. 손님은 처음에는 들어가지 못하다가 겨우 들어왔는데 다시 나가질 못했다. 그리고 “둥지 같다는 말이 믿을 만하군요”라면서 크게 웃어 댔다.
−<서소에 대해 쓰다(書巢記)>에서
이 집에 살면서 아침과 저녁 음식은 힘쓸 것을 생각해 많고 적은 양을 정했다. 그리고도 조금만 배부르면 식사를 그만두니 그릇을 다 쓸 필요도 없었다. 휴식으로 기와 혈을 조절하되 완전히 잠들 필요도 없다. 독서를 해 시원하고 편안한 정신을 만드는데 한 권을 다 읽을 필요도 없다. 옷 입는 것은 날씨를 봐 가면서 하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바꿔 입기도 했다. 수십 보 이상은 돌아다니지 않았고 내키지 않으면 그냥 멈췄다. 비록 예정된 곳이 있었어도 다시 길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손님이 오면 만나기도 하고 안 만나기도 했다. 간혹 사람들과 옛일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고, 함께 술잔을 나누기도 했는데 싫증나면 내버려 두고 얼른 일어섰다. 사방에서 서신이 와도 생략하고 다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서신을 전하는 사람이 오면 금세 답장을 보낼 때도 있지만 답장을 써 주질 않아 며칠 동안 머무르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그 상황에 따라 보내는 것이지 귀천이나 친한 정도를 따지지는 않았다. 내 발걸음이 도시에 닿지 않은 지도 대략 여러 해가 되었다.
−<새로 지은 집에 대해(居室記)>에서